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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731부대 생체실험 주도 비인간적 범죄자 | 이시이 시로

by Go뚜기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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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지 말아야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이시이 시로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극도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실험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그가 만든 생화학 및 세균 무기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우리 선조들은 그가 진행한 생체실험으로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시이 시로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항일 정신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731부대 이시이 시로
731부대 이시이 시로

 

이시이 시로 그는 누구인가?

이시이 시로는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 대장이었습니다. 항일전쟁 당시 731 부대를 조직·지도하여 중국인과 조선의 포로들을 생체실험에 잔인하게 이용했습니다. 생화학 무기 실험을 위해서 약 1만 명의 넘는 사람들을 실험체로 삼았고, 이름과 성이 알려진 공식적인 피해자 수만 약 3천여 명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실험 대상에는 어린아이와 청년, 노인, 여성 등 나이와 인종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잔혹한 '세균전'과 '생물전' 실험으로 인간에 대한 존중심을 짓밟았던 이시이 시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후, 전범 재판에서 제외되어 고국인 일본에서 생을 편안하게 마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이시이 시로 사진입니다.
이시이 시로

 

 

생애

이시이 시로는 1892625일 일본 지바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재주도 있고 똑똑하고 초등학생 때 하룻밤에 교과서 한 권을 외웠다고 합니다. 이시이 시로는 성인이 되어 의학 공부를 선택했고, 1916년에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했습니다. 이시이 시로는 자신이 일본 역사상 최초의 군의관 출신의 장군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동료들은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군의 군 계급제에 따르면 군의관으로 승급할 수 있는 직위에는 한계가 있었고, 뛰어난 군사적 공적이 없으면 승진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때 당시에는 군의관이 장군으로 진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시이 시로는 생화학 무기와 세균무기를 통해 공적을 쌓으며 결국 훗날 중장 진급에 성공합니다.

 

1928년 육군성 총사령관 나카타 테츠야마의 지원 아래에서 이시이 시로는 생화학 세균 연구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습니다. 러시아와 분쟁 관계에 놓인 일본은 전략적 자원이 부족하여 매우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때 당시 나타카 테츠야마는 국제법상 생화학 및 세균 무기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수 천명을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전략무기 개발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의 지원 아래 이시이 시로는 독일의 세균 무기 개발에 비밀리에 참가하게 되었고, 중국으로 돌아온 후 소령으로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생화학 및 세균무기를 개발을 준비하기 위해서 육군 의과대학 전염병 예방 부서의 강사로 활동을 하였고, 19328월 도쿄 와카마츠의 육군 의과대학에 전염병 예방 연구실을 설립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비록 이시이 시로를 포함하여 인원이 5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전쟁성은 이시이 시로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지 하며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아 이시이 시로 연구팀의 군비로 20만 엔의 비밀계좌가 배정되었는데, 당시 200,000엔은 육군 일반 사단의 군사비보다 높았습니다. 일본이 생화학 및 세균 무기 개발에 얼마나 관심이 높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생체실험

 

19338월 당시 일본육군장관 아라키 사다오의 승인을 받아 이시이 시로는 현화가와 중국 동북 교차로에 비밀 세균 연구 기지를 세우고, 중국인과 한국인 민간인을 생체 실험에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혹독하고 피비린내 나는 다양한 생체 실험이 진행되었습니다. 얼어붙은 시베리아에서 러시아군과 싸우는 일본군의 내한성을 검증하기 위해 생체 동상 실험을 진행하던 이시이 시로는 동상 실험의 과정에서 포로의 손을 차가운 얼음에 담가 얼어붙어 감각을 잃어가는 과정을 기록하며 수백 명의 중국 민간인을 불구로 만들었고, 실험으로 인해 사망한 민간인들은 화장터에 던져 시신을 파괴하고 흔적을 지워버렸습니다.

 

1934년 가을, 이시이 시로의 실험실은 중국의 자오샹지 장군이 이끄는 항일 연합군에 의해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으며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시이 시로는 비밀 연구 프로젝트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연구소를 하얼빈에 있는 일본육군병원 남분원으로 이전할 것을 신청했고, 외부 명칭을 관동군 내부번호 731로 변경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731부대는 바로 이때 붙은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731부대
731부대
아이에게 생체실험중인 731부대원들
아이에게 생체실험중인 731부대원들
생체실험의 만행 731부대
생체실험의 만행 731부대

이시이 시로가 이끄는 부대는 지속적인 확장을 하며 약 2600백 명 군인들이 소속된 부대로 커지게 됩니다. 실험연구를 통해 알게 된 세균실험의 성과를 전쟁무기로 사용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로 일본과 소련-몽골 연합군 간의 전투에서 22.5kg의 살모넬라균과 장티푸스균을 적에게 성공적으로 투척해 소련-몽골 연합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19407월부터 194112월까지 저장성, 후난성 등 중국 각지에 세균 무기를 공중 투하하여 중국 항일군과 민간인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그가 생명을 대하는 잔인함은 다른 사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425월 절강-장시 전투에서 731부대는 장티푸스와 파라티푸스균이 주입된 찐빵을 배고픈 중국인 포로 3,000명 이상에게 배포한 후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 감염된 포로들을 석방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만 명의 중국 군인과 민간인의 죽음으로 직결되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재난 지역을 탈출하여 난민이 되게 됩니다.

이시이 시로
이시이 시로

194588, 이시이 시로는 수톤의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준비하고 소련의 여러 지역에 방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 8월과 9월에 걸쳐 150만 명의 소련군이 관동군의 방어선을 뚫고 공격해 왔고, 관동군 사령부는 이시이 시로에게 모든 증거 인멸을 명령합니다. 명령에 따라 731부대의 범죄 증거물을 대부분 인멸한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데리고 관동군이 제공한 전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평생 입을 다물고 비밀을 무덤 속에 간직하라는 최고위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일본의 천황제를 폐지하고 일본을 민주공화국으로 완전히 변모시키기 위해 전범의 책임자들을 엄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1945412일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안타깝게 뇌출혈로 세상을 등지며 그의 계획은 흔들리게 됩니다. 해리 트루먼이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일본의 파시즘 세력들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루스벨트와 다르게 미국과 소련과의 첨예한 대립을 고려하여 일본을 동맹 세력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을 승낙하고, 천황을 대신하여 전범의 상징적 인물인 도조 히데키와 주동자들을 교수대로 보냈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이시이 시로는 전범 재판을 피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미국인과 접촉해 731부대 관련 전범 사면을 대가로 731부대 연구 결과를 교환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시신을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한 화장터
시신을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한 화장터

 

당시에 미국은 소련과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이시이 시로의 연구자료를 활용하기 위해 그의 요구를 수용하고 전범재판에서 그를 제외하였습니다. 당시 일본군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는 이시이 시로에게 250,000엔을 주며, 그가 731부대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실험하여 얻은 데이터와 교환하고, 세균을 이용한 실험보고서, 8000개 이상의 병리학 표본 및 슬라이드를 받아 냈습니다. 소련이 이시이 시로의 형사책임을 미국에게 추궁했지만 오히려 미국은 소련에게 이시이 시로가 실종되어 731부대원들을 전범으로 취급할 수 없다며 옹호하여 소련을 당황케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는데 집중하는 과정에서 1950625일에 조선인민군이 조국 통일을 위해 남하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일본을 미군의 군수기지로 삼는 과정에서 미군은 이시이 시로가 본업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묵인하고, 실전용 세균전용 곤충 병기를 만들어 한국 전장에 직접 투입까지 하게 됩니다.

생체실험중인 731
생체실험중인 731

이시이 시로의 생화학전 지식이 미국의 생화학전 무기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미국은 포트 데트릭 군사기지의 수장 볼드윈에게 이시이 시로를 고문으로 추천합니다. 이시이 시로는 포트 데트릭 기지에서 731부대의 방법을 활용하여 인간에 대한 세균전 실험을 수행하였습니다. 국익을 중시하는 미국의 보호 아래에서 그가 중단한 실험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후의 행적은 195967세의 나이로 도쿄에서 인후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전범 재판에서 제외된 731부대원들은 일본의 대학 병원과 의학 연구소 등의 요직에 앉아 승승장구하였다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잔인한 범죄를 일삼은 일당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은 현실에 분노를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인간적인 범죄자의 죄를 규명하고 정당한 벌을 받게 해야만 미래 사회에 다시금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시이 시로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시이 시로 잊지 말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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